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칠천량 해전 (문단 편집) === 7월 15일: 경계를 태만하여 기습을 허용하다 === 7월 15일 새벽경, 조선 수군은 꼬박 24시간을 노를 젓고 이제야 칠천량에 도착해 휴식(오침)을 취하게 된다.[* 칠천량은 육지로 움푹 파인 형세에다, 양 옆이 산등성이로 시야가 차단되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이 곳에 정박하면 안 된다고 배설이 간언했으나,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 이는 원균이 틀리지 않은 것이, 이미 앞서 원균의 2,3,4차 출정 모두 정박했던 곳이다. 과거에도 칠천량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에 따르면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7월 15일 낮경, 원균은 지금까지의 경과로 의욕을 잃고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 반면 거제 영등포, 가덕도에 있던 일본 수군들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부산포에 긴급보고했고, 이것이 기회임을 눈치챈 일본 수군은 본대를 모조리 출정시켜 칠천량으로 향했다. 특히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칠천량으로 갔다. 7월 15일 밤 10시경,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희득의 해상록에 따르면, '''겨우 작은 배 2척'''이 조선 수군 한복판에 접근할 때까지 조선 수군은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며, 일본 수군이 대포 2발을 쏘자 조선 수군은 당황해 닻줄을 끊어 우왕좌왕 함대 간 충돌이 일어났다. 군량선 4척에 불이 났으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김완은 기습해 온 적선이 단 2척뿐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즉 지휘권이 반쪽이었고, 그 반쪽마저 항명이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첫 기습은 5척이므로, 3척이 곧이어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이 제정신이었다면 이렇게 피곤한 때야말로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수군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즉 일본군이 조선 수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소리다!''' 군대에서 초병을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고,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원균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경계망이 뚫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데,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이야기했음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고, 이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 워낙 전과가 찬란하다 보니 부각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이순신은 싸움보다는 적의 동태와 전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러한 사전 정보를 충분히 수집한 후 아군이 100% 이긴다고 확신하는 전장에다가만 함대를 출진시켰다. 즉 23전 23승이라는 전과는 치열한 정보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다만 여건상 그렇지 못한 명량 해전과 왜교성 전투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 공격으로 당황한 채로 교전하여 싸움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